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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기념일

6월 민주항쟁과 박종철 고문 사건의 전말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 박종철은 사망하였다. 경찰은 '단순 쇼크사'라고 주장하였다.

최초로 중앙대학교 병원 의사 오연상 이 사망 직후 박종철의 모습을 보았다. 폐에서 수포음이 들리고 바닥이 물로 흥건하였다. 경찰들은 의사 오연상을 회유하고 압박을 하였으며 거짓 진술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의사 오연상은 양심껏 자신이 본 대로 이야기하였다.

그 후 세상은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그리고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가게 되었다. 부검을 한 사람은 국립수사과학연구소의 황적준 박사 이다. 경찰들은 황 박사를 둘러싸고 가족까지 협박하였다. 황적준 박사는 아내 손을 잡고 이야기하였다. "원칙대로 하자. 우리 정의롭게 하자. 내가 부검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쓰겠다. 앞으로 어떤 일이 우리 앞에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원칙대로 갑시다."

황적준 박사는 박종철 사망의 정확한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고 썼다.

오연상 의사와 황적준 박사. 두 분의 용기 있는 선택으로 박종철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상은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국민들이 더 분노한 것은 박종철은 피의자 신분이 아닌 선배 박종운 소재 파악을 위한 참고인으로서 조사받기 위해 불리어 간 것이라는 것이다. 참고인이란 수사에 협조하는 지은 죄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찰은 참고인인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경찰들은 이 당시 공포에 질리도록 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었다. 나중에 가해자 경찰에게 왜 이렇게 심하게 고문하였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한 번 남영동에 끌려온 이상 혐의가 없어도 똥물을 쏟을 때까지 때리고 짓밟고 고문한다. 그래야 바른말을 하고 이 밖에 나가서도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못한다."

박종철 물고문 사망 사건으로 온 국민은 분노하였고 도화선이 되어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2천 명이 모이게 된다. 그 가운데 고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박종철 살려내라 민주 쟁취 독재 타도 대통령 직선제 시행하라"

지난달 4월 26일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35회에서는 박종철의 사망을 최초 목격한 오연상 의사와 전화 연결을 한 모습이 방영되었다.